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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0

삶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곳은 임진강 바로 아래쪽 작은 촌, 당시에는 진짜


깡촌이었습니다. 지금은 P시가 되었고 교통이 편해졌지만, 당시로서는 하루에


두세 번,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야 M 읍에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던 그런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제 얘기의 일부는 40년도 넘은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 이 때를


기억하시는 분은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금 인터넷을 많이 쓰시는 분의 대부분은


그 당시 태어나기도 전일 테니까요.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그때는 그냥 그랬나


보다 하고 넘어가 주세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이북 분이셨습니다. 두 분은 고향이 전혀 다릅니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이북에서 결혼을 한 번 하셨고 자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 전에 일 때문에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시지 못한 경우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북 황해도의 작은 섬에 사시던 분인데 큰 오빠와 배를 타고 고향에 가다가,


기관 표류로 남하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돌아가시지 못하고


큰오빠(외삼촌)는 한국군에 입대하여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전쟁 중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나이 많은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파주에 살게 된 것은 그곳에 작은 미군 부대가 있었고 아버지가 거기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미군부대 다니는 것도 좋은 직장이어서 그 동네에서는 그나마


제법 사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당시는 초등학교 다닐 때 그때는 그 동네에


먹을 것이 없어, 학교 가는 날은 그나마 다행히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 빵을 먹었지만,


그렇지 못한 때는 굶어야 하는 애도 많았습니다. 저희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북에 가족이 있어서 그랬는지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월급을 받는 날이면 아버지는 친구와 어울리느라고 늦게 들어오거나


혹은 집에 며칠 씩 들어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 잡기에 능한 분이라 술과


도박,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부대 앞까지 찾아가


기다린 적도 있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안돼 보이기는 했지만, 저 역시 아버지와는 정이 없어 그런지


아버지 없을 때가 더 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엄마를


제가 독차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여동생도 있었지만 언제나 엄마는 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만 없으면 제가 제일 아랫목을 차지하고 다음엔 엄마 그리고


여동생이 제일 윗목에 잤습니다. 언제 부터인지 항시 엄마 젖을 만지며 자던 버릇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게실 때는 뭐란 얘기를


따로 들은 적이 없었는데도 그러기가 좀 불편하다는 마음이 들었었고, 그때는 제


여동생이 제 옆에 자고, 엄마와 아버지는 제일 윗목에서 주무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시는 날엔 엄마가 우리 옆방 작은 방에도 불을 넣고 두 분이 거기서 따로


주무시기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한참 크고 나서야 한방에서 부모자식 넷이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는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 딴 방으로


가는 것이 속으로 그렇게 섭섭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전혀 달랐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가 저와 동생을 낳은 어머니는


억척같이 노력하여 저와 제 여동생을 키우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었어도, 저와 제 동생에 대해서는 교육열이 대단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대학 나와


이만큼 사는 것은 99.9%는 어머니 덕입니다. 동생 역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 촌


동네에서 딸이 고등학교, 야간대학이라도 나온 것은 순전히 엄마 덕이라고 말입니다.


 


저와 여동생은 사이가 무척 좋았습니다. 보통 남매는 많이 싸우며 큰다고 하는데


제 기억에 동생과 싸운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여동생은 저를 무척 따랐습니다.


지금 다 커서, 아니 이제 늙어 가면서도 제 동생은 제게 자기 주장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제가 미안할 정도입니다만, 동생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언제나 제가 자기의


우상이었고, 그런 것이 너무도 고맙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해준 것 없이 도리어 동생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의 오빠 동생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아주아주 특별한 사이입니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는 가끔 아버지가 부대에서 가지고 나오시는 PX 물건을 모았다가,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 구한 물건을 한 번씩 P 시나 M 읍으로 나가 파시기도 했습니다.


그 동네는 휴전선이 가까운 곳이라 곳곳에 군 검문소가 많았고, 미제 물건 파는 것을


가끔 단속도 하여 그럴 때는 어머니를 따라 중학생이던 제가 가끔 따라 다녔습니다.


작고 제법 값나가는 물건은 제 책가방에 넣어 다니면, 그것까지 뒤져 보는 경우는


절대 없었거든요. 서울에서는 값을 좀 더 많이 쳐준다하여, 물건이 되면 서울까지


나오는 경우도 있었고 그때는 제가 꼭 같이 다녀주기를 엄마도 바랐습니다. 촌에서


자란 저도 서울은 꿈과 같이 낯선 곳이었습니다. 중학 다닐 때까지 그 동네에서는 서울에


못 가본 친구 놈도 있었다는 것 요즘 분들은 상상하기 어려우시겠죠? 서울이란 엄청나게


복잡하고 큰 도시가 제가 앞으로 살 곳이라고 저는 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2 때였습니다. 그때가 방학 중이었는지 학교를 가지 않고, 아침 일찍 엄마와 집을


나섰습니다. 따라 가겠다는 여동생을 몰래 떼어놓고, 저는 미제 물건이 가득 들은


책가방을 들고 엄마는 저보다 더 큰 가방에 더 많은 물건을 넣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엄마보다 키가 컸습니다. 저는 사춘기가 중학교 일학년 2학기 무렵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고추에 털이 아주 가느다랗게 나오기 시작한 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였고,


자위하다 처음 사정이란 것을 한 것이 2학기 때였으니까요.


 


엄마의 가방은 크고 무거워서 제가 같이 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버스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M읍, P시를 지나면서는 비집고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버스 안은 발 디딜 데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마다 버스는 ‘S’ 자 모양으로


곡예 운전을 하여, 승객의 몸이 버스 문 반대쪽으로 쏠리게 하면 버스 차장이 간신히


버스 문을 닫을 수 있었습니다. 제 가방은 좌석 머리 위 선반에 올렸지만 엄마의 가방은


바닥에 놓아 저와 엄마는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엄마보다 키가 큰 저는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어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몸이


밀렸습니다. 처음에 제 옆에 서 있던 엄마를 끌어 제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제가 몸으로


이리저리 밀리는 엄마의 몸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다소 편해졌는지 엄마는


좁은 틈으로 간신히 얼굴을 돌려 제게 웃어 보이며 힘들지 않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별 것 아니라는 표정만 지었습니다.


 


사람은 더 많아지고, 엄마와 제 몸 사이에는 빈틈이 하나 없었습니다. 무릎 아래는 엄마와


떨어져 바닥에 간신히 발을 딛고 서 있었지만, 제 왼 쪽 허벅지는 엄마의 오른쪽 허벅지 뒤쪽에


바짝 붙어 있었고, 왼쪽 아랫배는 엄마 오른쪽 엉덩이에 그리고 왼쪽 가슴은 엄마 등 오른쪽에


빈틈하나 없이 붙어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엄마와 제가 바로 붙어 있지는


않은 점이었습니다. 몸의 반만 엄마에게 붙어 있으므로 발기된 자지를 오른쪽 바깥으로 향하게


하면 엄마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갑자기 서면서 제 몸이 왼쪽으로 밀려, 이젠 엄마의 몸과 제 몸이 일자로 붙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려고 누운 엄마 젖을 만지면내 고추가 단단해진다는 것을 처음 의식하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은 고추이나마 단단해지면 그것을 손으로 쥐거나 어딘가에


부비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엄마에게 꼴린 자지를 들키지 않으려고, 저는 한 손으로는


엄마 젖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자지를 움켜쥐고는 했습니다. 어떤 때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자지를 요에 바싹 붙여 문지르곤 했습니다. 그것을 감히 엄마 몸에 댈 생각은 못했습니다.


젖을 만지며 자지가 꼴린 것을 엄마에게 들키면, 엄마가 다시는 젖을 못 만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부끄럽기도 하고요.


언제가 한번, 자다가 깬 적이 있었습니다. 젖을 마구 주무르다가 잠이 들었는지 엄마의 내복은


젖가슴 위로 밀려올라 간 채로 흰 젖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어슴푸레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잠버릇이 험한 여동생은 이불도 차내고 제일 윗목으로 굴러가, 자고 있더군요. 엄마의 한 손이


손바닥을 위로 제 쪽으로 떨구어져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습관처럼 다시 엄마 젖에 제 손을


얹었습니다. 엄마가 깨지 않게 살며시 만져 보기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손 때문에


제가 엄마 가까이 눕는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엄마 손을 엄마 쪽으로 붙이며 가까이 눕자 엄마


손이 바로 제 고추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엄마 쪽으로 몸을 반쯤 옆으로 돌려 눕자


꼴린 제 자지에 엄마 손이 느껴졌습니다. 그 느낌은 옷 속으로 제 손을 넣어 제가 직접 제 자지를


만지는 것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엄마 젖을 만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몇 번을 의식적으로 엄마 손에 제 아랫도리를 댔다가 떼었습니다.


엄마는 전혀 잠에서 깰 기미가 없었고 저는 고개만 조금 들어 여동생을 살폈습니다. 윗목의


여동생은 벽을 향해 누워 있어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더 큰


욕심이 생겼습니다. 차마 아랫도리를 벗지는 못하고 내복 소변구멍을 통해 제 자지를 살며시


꺼냈습니다. 반 쯤 까진 귀두가 번들거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엄마 손가락 끝에 댔다간 바로


떼었습니다. 엄마의 고른 숨소리는 여전했습니다. 전 몸을 조금 들어 제 자지를 엄마 손바닥에


얹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을 제 몸무게로 누르면 엄마는 틀림없이 잠에서 깰 것입니다. 혹시


그러하더라도 모든 것이 잠결에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짐짓 잠꼬대하듯 소리 내며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엄마를 안았습니다. 너무 바싹 안으면 그것도 엄마 깨울 수 있기


때문에 어중간히 동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엄마의 손이 제 몸과 엄마 몸 사이에 끼여지면서


자연히 제 자지를 쥐는 꼴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손은 발기된 제 자지보다 차가웠던 것이


기억납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저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갑자기 몸을


엄마에게서 떼고 돌아누웠습니다.


그리고 제 자지를 움켜잡고 몸을 잔뜩 웅크리자, 전신이 잠시 긴장되었다가는 갑자기 자지가


껄떡이며 끈적한 물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다 나왔는가 싶다간 다시 또 꺼덕이며 물을 쏟고


또 쏟고, 몇 번을 그러다가 멈췄습니다. 한참을 돌아누워 움츠리고 있던 저는 내복 속이 축축해


진 것을 그제서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달리 처리할 방법도 없었던 저는 아침까지


그 옷을 입고 있을 수밖엔 없었습니다.


바로 누웠을 때 엄마는 몸을 돌려 제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습니다. 엄마의 윗도리는 여전히


밀려 올라간 채였으나, 더 이상 엄마 젖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엄마와 첫 성적 접촉이었


습니다만, 엄마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을 겁니다.



 




잠든 엄마의 손에 제 자지를 쥐게 하였던 것과, 버스 안에서 엄마 엉덩이에 잔뜩 꼴린 자지를


바짝 붙이고 선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라도 꼴린 자지를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뒤로 뺐습니다. 너무 좁은 공간이라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최소 아랫배만이라도


엄마의 엉덩이에서 떼려고 뒤로 제 엉덩이를 뺏습니다. 그러나 만원 버스에서는 그것은 소용


없는 짓이더군요. 제가 조금 엉덩이를 뒤로 빼 내어도 앞으로 밀렸던 엄마의 몸이 돌아오면서


다시 닿게 되고, 또 차가 흔들리면 뒤로 빼냈던 제 엉덩이가 갑자기 밀려 엄마 엉덩이에 잔뜩


발기된 자지를 쳐 박는 꼴이 되곤 했습니다. 처음에 엄마 몸에서 벗어나려 오른 쪽으로 향하게


했던 자지가 이제는 도리어 팽팽한 엄마의 오른쪽 엉덩이 살을 누르게 되어 엄마는 더 잘 나의


상태를 알게 될 것 같았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왼손을 슬그머니 내려 엄마와 내 사이에


넣었습니다. 좁은 공간에 손을 넣으려니 엄마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꼴이 되었지만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발기된 자지를 감추는 게 급선무였으니까요. 오른 쪽으로 향한 자지를 끌어 제 몸


정중앙에 세웠습니다. 거기는 엄마의 엉덩이 골짜기 사이이므로 엄마를 누르게 되는 것이 덜


했습니다. 더구나 제 손으로 제 자지를 가리고 있었으니 엄마의 팬티 가장자리, 엄마 허벅지를


감싼 팬티라인이 제 손등에 느껴져 와도, 그것이 자지를 엄마에게 대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엉거주춤 그런 자세라도 유지하고 싶었는데, 다시 버스가 속력을 내면서 가속하자


제 몸은 엄마와 함께 밀리면서 넘어질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많고 이리저리 밀리는 와중에 엄마를


몸으로 감싸려다 보니, 오른손, 왼손 모두 손잡이를 잡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발기된 제 자지는 엄마 엉덩이에 꽉 끼여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몇 번 그것을 떼려


하였으나, 흔들릴 때마다 제 자지를 엄마 엉덩이에 박아대는 이상한 자세가 되어 버려, 저는


그냥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제발 엄마가 제 상태를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엄마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바라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앞만 바라보던 엄마가 고개를 반쯤 돌리며 제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그 말은 제가 괜찮으냐고 물어 본 것일 수도 있지만, “괜찮아!”라고 엄마가 괜찮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그런 것까지 판단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엄마가 괜찮으니 억지로 힘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말을 하고 나서, 엄마의 손 하나가 엄마 몸 뒤로 저와 엄마 엉덩이 사이로 파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전 깜짝 놀랐습니다. 제 자지를 떼라는 뜻인 줄 알았거든요. 만약


그랬다면 엄마 손은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거나 제 자지를 밀어내려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엄마 손의 움직임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몸이 앞으로 밀릴 때 그 손은 발기된 아니 잔뜩


 꼴려 있는 제 자지를 손바닥을 뒤로 돌려 잡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워서, 자지 닿는 게 싫어서


제 자지를 꽉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손으로 제 자지를


감싸다가는 결국 그것을 살포시 쥐었습니다.


 


저는 어쩔 몰랐습니다. 주변에 밀려 서 있는 승객들은 제각기 서 있기도 바빠, 저나 엄마에게


신경 쓸 리가 없었고 또한 빈 틈 없이 서로 끼어 서 있는 상태에서 아래를 내려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엄마 손에 잡힌 자지를 빼내려


엉덩이를 뒤로 빼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억지로 몸을 빼도 엄마는 몸을 뒤로 밀며 제 자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포장도로를 달리는데도 차는 왜 그리 흔들리는지, 저는 몸을 빼지 못하고 몇 번 더 엄마 손에


쥐인 자지로 엄마 엉덩이를 쳐 박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당황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스는 달리고 저는 엄마 손에 쥐인 채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과 전혀 다른 느낌을 제 자지를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정할 때 자지가 저절로


꺼덕이는 것처럼, 그보다는 작지만 반복되는 수축과 이완을 통해 제 자지에 피가 더욱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은 제 자지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엄마가 제 자지를


아주 작게 쥐었다 폈다 하는 것에 따라 생겨난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그 순간 제 얼굴이 더


달아오르고 더 숨 가빠 했을 겁니다.


 


엄마가 제 자지를 조심스레 주무르는 그 느낌은 제 행동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전 더 이상 엄마


몸에서 떨어지려 억지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자연스레 몸을 맡기었습니다.


억지스런 자세를 취하지 않자 서 있기 훨씬 편해졌고 엄마 역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창밖을 내다보며 ‘여기가 어디지’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버스가 지금 지나는 곳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엄마는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저도 엄마 어깨를 통해 창밖을


내다보는 척 했습니다. 그러자니 몸을 숙여야 했고 그러면서 제 자지를 슬그머니 엄마 손에


밀어붙여 보았습니다.


엄마 손을 통해 엄마의 폭신한 엉덩이가 느껴졌습니다. 엄마는 분명 내 의도를 알아 차린듯했


습니다. 제 자지를 쥔 엄마의 손에 분명 힘이 들어가는 것을 제가 느꼈으니까요. 정말 머리칼이


곤두 서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정할 때까지 제 자지를 거기에 문질러 부비고 싶었지만, 차마 그 순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머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서울에 간다고 엄마로서는 좋은


비누로 머리를 감은 모양이었습니다. 서울에 가는 것도 싫고 저는 이 상태가 마냥 계속


되기만 바랐습니다.


 


버스가 서울에 들어섰는지 정류장에 들를 때마다 늘어만 가던 사람이 조금 줄었습니다.


아까보다는 숨 쉴만해졌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더 바빠만 갔습니다. 이러다가 버스가


종점에 도착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주변 눈치도 보면서 전 엄마 손에


제 자지를 밀어 붙였습니다. 이미 엄마가 내 상태를 다 알고 있고 또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받아 줄 것이란 믿음을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뭔가 쏟아내야


할 것 같은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엄마 몸에 바싹 다가서 자지를 부벼대는 제 마음을 엄마도


읽었는지, 제 자지를 쥐는 엄마 손 움직임도 바빠졌습니다. 처음엔 살며시 쥐었다 폈다만


하던 엄마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제 불알 부위를 감쌌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제 자지 모양을 따라 아래위로 훑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쥐고 펴고를 하다가는


다시 자지 길이를 따라 훑는 엄마 손가락이 귀두 부위에 다다를 때 저는 폭발하기 시작했


습니다.


 


자지가 벌떡 일어서며 첫 발사를 시작할 때, 전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아니 실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전 고개를 숙여 엄마 어깨에 기댔으니, 그때 제가 흘리는 신음


소리를 엄마도 들었기 쉽습니다. 엄마는 제가 무얼 하는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제 자지를


쥐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조금 전처럼 바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지를 않고, 긴 시간


더 꽉 쥐었다가 한번 씩 손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한번 남은 물을 뿜어냈고요.


얼마나 오랜 동안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맥이 풀리고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려다가 말고는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옆으로


잠깐 보인 엄마 얼굴엔 웃음기를 감추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와 가네.” 엄마가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제 자지를 꽉 잡았다가는 슬그머니 엄마 앞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엔 제 손을 그곳으로


가져갔습니다. 옆 눈으로 좌우를 살피면서 제 바지 앞을 만져 보았습니다. 바지 속은


추축했지만 겉까지 젖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제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변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물건은 무사히 그리고 또 만족스런 가격으로 중간 상인에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만족스런 표정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는 종점에서 타서 그런지 앉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집에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옆방에 자리를 미리 펴두어 엄마는 그 방으로


가서 주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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